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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극우 정치는 더 이상 과거 파시즘의 단순한 재탕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트럼프가 주도하는 미국의 마가주의, 유럽 각국의 극우 정당, 일본과 남미 일부 지역의 권위주의적 흐름,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되살아나는 매국・파쇼 세력의 출현까지, 세계 곳곳에서 민주주의의 외피를 쓴 혐오와 배제의 정치가 힘을 얻고 있다.

이 글은 이러한 흐름을 ‘민주적 파시즘’이라는 개념으로 분석한다. 선거와 의회, 법치의 형식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면서도, 그 내부에서 소수자와 이주민, 여성, 노동자, 반대파를 적으로 만들고 민주주의의 실질을 허무는 정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살핀다.

특히 필자들은 오늘의 파시즘을 단순한 독재 욕망이나 극단적 선동으로만 보지 않는다. 경쟁과 불평등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생겨난 소외감, 사회적 추락에 대한 불안, 평등에 대한 반발, 원한과 분노의 정치가 어떻게 극우의 대중적 기반을 만드는지 철학적·사회학적으로 짚어낸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트럼프주의를 넘어, 세계적 차원에서 확산되는 극우와 혐오정치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한국 사회 역시 예외가 아니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약화시키고, 안보와 질서의 언어로 평등과 인권을 공격하며, 외세 의존과 반공주의를 결합한 매국적 파쇼 흐름은 이미 우리 정치의 현실적 위협이 되고 있다. 이 글이 오늘의 파시즘을 낡은 역사 용어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작동하는 정치의 문제로 읽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 편집자

 

2021년 1월 6일 의회 난입 사태 5주년을 맞아 워싱턴 연방의회 의사당 밖에서 한 시위 참가자가 “마가여 영원히”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있다. 출처: Valerie Plesch / Bloomberg via Getty Images

 

우리는 지금 ‘민주적 파시즘’의 부상을 보고 있다

 

카롤린 암링거, 올리버 나흐트베이

트럼프는 자본주의적 근대가 낳은 깊은 소외감이라는 정서를 파고들어 권력을 잡았다. 그는 원한과 분노를 부추겨 정치적 이익으로 바꾸는 데 누구보다 능하다. 원한을 만들어내는 데서도, 그 원한을 대변하는 데서도 그렇다. 그러나 좌파는 아직 이에 맞설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1942년 이렇게 내다봤다.
미국의 파시즘은 “미국식으로, 그에 걸맞게 민주적인 모습”을 띨 것이라고.
그의 예견은 맞아떨어"졌다. 바로 그 점이 그것을 막기 더 어렵게 만든다."

 

“미국의 파시즘은 “미국식으로, 그에 걸맞게 민주적인 모습”을 띨 것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일기』

 

지난해 말 도널드 트럼프는 이민세관단속국(ICE) 요원 2천여 명을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와 세인트폴에 투입했다. 사실상 ‘트윈시티’를 장악한 것이나 다름없는 작전이었다. 과거 워싱턴DC와 민주당 소속 시장이 이끄는 도시들에 주방위군을 배치했던 일조차 그에 비하면 순찰 수준으로 보일 정도였다. 요원들은 이주민 약 3천 명을 찾아내 체포했고, 작전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여했던 미국 시민 르네 굿과 알렉스 프레티를 살해했다.

미니애폴리스 급습은 트럼프가 ICE를 단순한 권위주의적 경찰조직이나 예산만 비대한 단속기구로 보지 않는다는 점을 드러냈다. 그는 ICE를 자신의 정치적 사병처럼 움직이려 했다. 요원들이 사복에 가까운 복장으로 현장에 나서고, 훈련은 최소한에 그쳤으며, 지역 정부와 경찰을 의도적으로 반복해 흔든 정황은 그 노골적인 비전문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동시에 정치적 연출이었다. 이주민을 향한 잔혹함을 대중 앞에 전시하고, 반대 진영에는 “평화적 항의의 한계는 여기까지”라는 메시지를 과시한 것이다. 팟캐스터 조 로건1)조차 ICE를 게슈타포에 빗댔다. 1) 미국의 코미디언이자 팟캐스터로,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큰 토크쇼 《조 로건 익스피리언스》를 진행한다. 정치·사회 현안을 폭넓게 다루며, 특히 미국 보수·자유지상주의 성향 청중에게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

로건의 비유가 정확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말은 더 근본적인 질문을 건드린다. 트럼프 행정부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다. 첫 임기 동안 이 질문은 어느 정도 정리된 듯했다. 거친 수사에도 불구하고 그의 국정 운영은 공화당 대통령에게서 예상할 수 있는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2020년 대선 패배 뒤에는 미국 정치가 대체로 ‘정상’으로 돌아갈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2021년 1월 6일 전까지는 그랬다. 트럼프는 선거를 도둑맞았다는 음모론을 퍼뜨리며 군중을 선동했다. 그 군중은 평화적 권력 이양을 막겠다며 의회를 습격했다. 그 시점에서 트럼프를 단순히 권위주의 성향의 포퓰리스트로만 볼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해졌어야 했다. 그렇다면 그는 파시스트인가.

파시즘이 처음 권력을 잡은 것은 1월 6일보다 대략 100년 앞선 1922년 10월이었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검은 셔츠단 5만 명을 이끌고 ‘로마 진군’을 벌였고(정확히는 보수 엘리트들이 그에게 권력을 넘기도록 압박했다), 결국 권좌에 올랐다. 1월 6일의 의회 난입은 로마 진군과는 분명히 달랐다. 트럼프는 누군가에게 무엇을 “점거하라”고 노골적으로 지시한 적이 없고, 지지자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간 뒤에도 대체로 어슬렁거리며 셀카를 찍는 모습이 많았다.

그날의 장면은 축제처럼 번진 소동에 가까웠다. 극우 민병대, 큐어넌 추종자2), 티파티 활동가3), 바이커, 게이머, ‘남성성 커뮤니티’ 코스프레 집단까지 여러 부류가 뒤섞여 난장을 만들었다. 2) 미국 극우 음모론 운동이다. 민주당과 진보 세력이 비밀 범죄조직을 운영한다는 식의 허위 주장을 퍼뜨렸고, 2021년 1월 6일 미국 의회 난입 사태에도 일부 추종자들이 가담했다. 3) 2009년 무렵 등장한 미국 보수우파 대중운동이다. 작은 정부, 감세, 재정지출 축소를 내세웠으며, 이후 공화당의 우경화와 트럼프주의 확산에 영향을 미쳤다.

소셜미디어가 흐름을 이끌었지만 조직화 수준은 높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1월 6일은 더 큰 변화의 징후였다. 오늘날 극우는 위계적으로 결속된 조직이라기보다 분산된 네트워크에 가깝다. 전투 대형이 아니라 떼처럼 움직인다. 더 위험한 것은 그 평범함이다. 20세기 파시즘과 달리 오늘의 파시즘은 선거민주주의의 규칙 안에서, 우리의 일상 속에서 전개된다. X 같은 소셜미디어에서 파시즘 선전은 사실상 어디에나 있으며, 대중문화에서도 점점 더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 스페인에서는 팔랑헤4) 찬가 ‘카라 알 솔’ 리믹스가 스포티파이 차트 1위에 올랐다. 독일에서는 부유층 자녀와 스킨헤드를 가리지 않고 이탈리아 디제이 지지 다고스티노의 유로댄스 히트곡 ‘라무르 투주르5)’ 박자에 맞춰 외국인 혐오 구호를 외친다. 오늘의 파시즘은 민주주의의 리듬에 맞춰 춤춘다. 4) 1930년대 스페인에서 등장한 파시즘 정당이다. 프랑코 독재 체제의 핵심 정치 기반 가운데 하나였으며, 강한 민족주의와 반공주의, 권위주의를 내세웠다. 5) 이탈리아 디제이 지지 다고스티노가 1999년 발표한 유로댄스 곡이다. 최근 유럽 일부 극우 집단이 이 곡의 박자에 맞춰 외국인 혐오 구호를 외치면서 논란이 됐다.

무엇이 파시즘이고, 무엇이 아닌가

트럼프 첫 임기 때부터 그의 통치를 ‘새로운 파시즘’으로 볼 수 있는지를 두고 논쟁이 이어졌다. 진보·자유주의 진영은 비교적 쉽게 그 이름을 붙였지만, 비판자들은 트럼프 체제에는 20세기 파시즘의 핵심 요소가 빠져 있다고 반박했다. 특히 좌파 일부는 트럼프 정치의 뿌리가 미국 민주주의 자체에 있고, 정착민 식민주의의 기원과도 이어진다는 점을 강조했다.

‘파시즘’은 무겁고 역사적 함의가 큰 단어다. 종종 도덕적 분노를 끌어내기 위한 자극으로만 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분석의 언어로 본다면, 파시즘을 오로지 과거의 현상으로만 취급하지 않는 것은 충분히 타당하다. 서구 전역을 정치적 퇴행의 파도가 덮치고 있고, 폭력 사건도 늘고 있다.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활동가를 겨냥한 총격, 의회 난입, 영국의 우익 폭동, 독일 지방에서 정치인을 향한 살해 협박이 이어진다. 빅토르 오르반6)식 ‘비자유주의적 권위주의’를 넘어서는 정치를 내세운 정당들이 이제 권력의 문턱까지 다가섰다. 독일 동부에서는 의회민주주의의 종식을 뜻하는 ‘체제 변화’를 꿈꾸는 극우 세력을 품은 독일대안당(AfD)의 지지율이 40%에 이르고 있다. 6) 헝가리의 우파 정치인으로, 2010년부터 2026년까지 장기 집권했다. 그는 선거 제도는 유지하면서도 언론·사법·시민사회를 압박하는 ‘비자유주의 민주주의’의 대표 사례로 자주 거론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파가 모두 파시스트라는 뜻은 아니다. 2024년 대선 과정에서 카멀라 해리스는 트럼프를 여러 차례 ‘파시스트’라고 불렀다. 그 말이 실제로 겨냥한 것은 ‘독재자’에 가까웠다. 철학자 제이슨 스탠리도 미국은 이미 파시즘이라고 말하지만, 그건 분명 사실이 아니다. 민주당이 무능하고 맥이 빠진 야당일 수는 있어도, 금지되거나 박해받고 있지는 않다. 민병대가 버니 샌더스나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스를 끌고 가 수용소에 넣는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스탠리는 ‘한 지도자가 민족을 대표하는 초민족주의 운동’을 파시즘으로 묶는데, 그렇게 되면 파시즘 고유의 특징이 흐려진다. 그는 노예제가 있던 시기의 미국 남부까지 파시즘의 한 형태로 본다. 특정 집단의 평등권을 부정하고 강제노동을 강요하는 체제는 명백한 억압 체제다. 그러나 노예제를 유지한 민주주의도 백인 다수에게는 자유선거와 권력분립, 폭넓은 시민권을 보장했다. 이는 파시즘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요소다.

독일에서는 ‘점진주의’ 관점에서 이 용어가 쓰이기도 한다. 신자유주의, 나아가 부르주아 사회 전체가 급진화되면서 ‘파시즘화’가 진행된다는 식이다. 그러나 파시즘이라는 개념을 역사 속 온갖 부당함을 포괄하는 만능 범주로 넓혀버리면, 오늘의 현실을 선명하게 분석하기 어려워진다. 민주적 권위주의와 파시즘 사이의 질적 차이가 흐려지고, 파시즘 세력이 스스로를 바꾸며 적응하는 능력도 과소평가할 수 있다. 예컨대 버락 오바마와 조 바이든 행정부에서도 대규모 추방은 있었다. 그러나 그 잔혹함을 공개적으로 전시하고, 지지자들이 이를 하나의 구경거리처럼 소비하게 만드는 것은 트럼프가 유독 능숙하게 구사하는 방식이다.

비극도 희극도 아니다

파시즘 개념을 오늘의 현실에 적용하려면 먼저 역사적 맥락을 따져야 한다. 강령과 정치적 양식에서 일부 닮은 점이 있더라도, 오늘 우리가 파시즘이라 부르는 현상이 곧 나치즘과 같은 것은 아니다. 나치즘은 광범위한 대중운동이었다. 극단적 인종주의 이데올로기, 민족주의 선전, 폭력적 포그롬7)이 결합한 체제이기도 했다. 또한 오늘의 파시즘을 격렬한 계급투쟁의 시대가 되풀이되는 현상으로만 볼 수도 없다. 파시즘이 노동운동을 짓밟기 위한 도구로 다시 등장한다는 식의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7) 특정 민족·종교 집단을 겨냥한 집단 폭력이나 학살을 뜻한다. 원래는 제정 러시아 시기 유대인을 향한 폭력 사태를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오늘날에는 국가나 다수 집단이 묵인하거나 부추긴 소수자 공격을 넓게 지칭할 때도 쓰인다.

역사적으로 파시즘은 전간기8) 극우 정치의 특정한 형태를 가리킨다. 지도자 숭배, 조직적 거리 폭력, 독재, 그리고 실제이든 상상이든 ‘국민의 적’으로 지목한 반대파를 제거하려는 충동이 그 특징이었다. 8)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1939년까지의 시기를 가리킨다. 이 시기 유럽에서는 경제위기와 사회 불안 속에서 파시즘과 나치즘이 급부상했다.

이 기준에서 보면 모든 권위주의 정부를 파시즘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이탈리아 총리 조르자 멜로니나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은 자국을 노골적인 비자유주의 민주주의로 바꾸려 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들을 독재자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늘의 극우 흐름은 20세기 파시즘과 닮은 점보다 다른 점이 더 많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역시 과거와는 다른 형태로 작동한다. 무엇보다 지금은 유럽과 대서양 세계의 강대국들이 서로 전쟁을 벌이는 상황이 아니다. 물론 아프가니스탄과 중동 등에서 지정학적 패권을 둘러싼 전쟁이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많은 참전 군인이 생겨났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처럼 대규모의 ‘잉여 남성’이 사회 밖으로 밀려나 소외됐던 상황과는 비교하기 어렵다.

사회경제적 조건도 다르다. 2008년 금융위기는 우파에 새로운 동력을 줬지만, 오늘의 경제위기와 그 사회적 여파는 1930년대와 성격이 다르다. 당시에는 대량 실업이 사람들의 삶의 목적을 무너뜨리고 판단력까지 흔들었다. 반면 오늘날 중앙은행과 정부는 위기를 완화하기 위해 상시적으로 개입한다. 최근 몇 년간 주식시장은 최고치를 경신했고, 대공황 때와 달리 트럼프 첫 임기 동안 미국은 완전고용에 가까웠다. 지금 인플레이션이 존재하지만 하이퍼인플레이션은 아니다. 무엇보다 권력을 넘볼 만한 강력한 사회주의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의 시대정신은 극도로 약해진 좌파가 특징이다. 이런 점에서 2020년대는 1920~30년대의 반복이 아니다. 비극으로도, 희극으로도 아니다.

파시즘의 ‘반(反)근대성’

따라서 새로운 파시즘은 오늘의 역사적 조건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트럼프식 권위주의는 노예제의 유산이 남아 있고, 불평등과 인종주의, 폭력이 유럽보다 훨씬 강하게 공적 삶을 규정하는 미국 사회를 반영한다. 그 안에서는 이민자 혐오와 백인우월주의도 함께 작동한다. 반면 유럽의 극우 정당들은 국가 중심의 민족주의를 앞세우는 경향이 강하다. 이들은 ‘국가 통합을 위협하는 적’을 설정하고, 그에 맞서야 한다는 정치적 서사를 동원한다.

20세기 파시즘을 밀어 올린 핵심 동력 가운데 하나는 사회적 평등에 대한 반발이었다. 여기서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을 집요하게 파괴하려는 충동이 나왔다. 스탈린이 이끈 코민테른은 파시즘을 자본의 ‘직접 대리인’으로 보고, 자본주의를 구하기 위해 등장한 세력이라고 해석했다. 이 설명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그렇다고 대자본 일부의 지원 없이 파시즘을 설명하기도 어렵다. 파시즘을 과거 일부 연구처럼 “사악한 유혹자와 유혹당한 대중”이 만들어낸 비이성적 운동으로만 볼 수도 없다. 그럼에도 막스 호르크하이머의 유명한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자본주의를 말할 의지가 없다면 파시즘에 대해 입을 다물어야 한다.” 자본주의와 파시즘은 모두 불평등을 자연스러운 질서로 보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기에 현대의 파시즘은 근대 사회에 존재하는 특정한 ‘정서 구조’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다른 종류의 근대성을 향한 갈망이다. 근대 사회는 자연적 위계에 반대하고, 신앙과 미신을 이성·합리성이 대체한다고 주장한다. 자연을 인간의 지배 아래 두려 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이 유한하고 한계를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근대 사회가 내세운 핵심 약속, 즉 ‘상향 이동을 통한 사회 통합’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사회적 추락의 공포가 전반적인 부정성을 낳았다. 그 결과 자유주의적 근대는 자기 자신을 향한 파괴성을 만들어냈다. 파괴를 ‘치유’의 방식으로 제시하는 새로운 파시즘이 등장한 것이다.

파시즘이 급격한 사회 변동기에 매력적으로 비치는 이유는 집단적 자기애와 동일시의 대상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분노하고 방향을 잃은 개인은 ‘민족 공동체’에 자신을 녹여 넣을 수 있다. 그 공동체는 개인주의적이고 다문화적인 사회와 구분되며, 내부의 다양한 분파는 자유주의 민주주의에 대한 파괴적 반란과 사회적 위계의 복원을 향한 욕망으로 묶인다.

그렇다고 파시즘이 근대성 자체에 정면으로 반대했던 것도, 지금도 반대하는 것도 아니다. 기술이나 경제를 다루는 방식만 봐도 파시즘은 근대성의 여러 요소를 품고 있다. 파시즘이 노리는 것은 반근대가 아니라 ‘대안적 반근대성’, 즉 차갑고 유동적이며 위기투성이인 부르주아 근대에 맞서 신화적 질서, 윤리와 안정감을 약속하는 질서다. 그것은 위대함으로 규정되는 영원한 질서로 스스로를 상상하며, 개인도 그 위대함에 닿을 수 있다고 유혹한다. 피터 틸9)이나 일론 머스크 같은 인물들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9) 페이팔 공동창업자이자 실리콘밸리의 대표적 투자자다. 자유지상주의와 기술 엘리트주의 성향으로 알려져 있으며, 트럼프와 J. D. 밴스 등 미국 우파 정치인들을 지원해온 인물로도 거론된다.

옥스퍼드의 역사학자 로저 그리핀은 1990년대 초 파시즘을 영향력 있게 정의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파시즘은 “신화적 핵”을 가진 혁명운동이며, 민족의 재탄생이라는 상상을 담은 “포퓰리즘적 초민족주의”다. 파시즘은 과거에 대한 민족 신화를 필요로 했다. 그 신화를 미래로 돌려세우기 위해서다. 파시즘은 잃어버린 유토피아를 복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장대한 미래의 환상까지 품는다. 세계사적 위대함이 민족에 부여되고, 개인은 그 민족과의 동일시를 통해 자기애적 만족을 얻는다. 나치가 집착적으로 떠들던 ‘천년 제국’의 환각이 그런 예다.

폭력의 쾌감

파시즘 연구자 로버트 팩스턴은 그리핀의 ‘이데올로기’ 차원을 넘어, 결정적인 한 가지를 강조한다. 실천의 요소다. 팩스턴에 따르면 파시즘은 “공동체의 쇠퇴, 굴욕, 피해의식에 집착하고, 이에 대한 보상으로 통합·에너지·순수성의 숭배를 만들어내는 정치적 행동 양식”이다. 통합, 힘, 순수성은 배제와 폭력을 통해 달성된다. 폭력은 파시즘의 핵심 특징이지만, 단지 수단이 아니다. 폭력은 감정적이고, 구원적이며, 해방감을 주고, 금기를 넘는 행위이자 초월의 체험이 된다. 폭력을 통해 사람들은 ‘진짜 자기’와 하나가 된다고 느낀다. 폭력은 ‘민족이 피해자’라는 신화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엘리트, 외부의 위협, 외국인 때문에 내가 피해자라는 감각과 결합한다.

20세기 파시즘 사상에서 개인주의가 설 자리는 없었다. 파시즘은 사회를 개인의 집합이 아니라 연대와 대오로 이뤄진 유기체로 봤다. 스스로를 사회생활 전체를 완전히 통합하려는 운동으로 이해했다. 경제적으로 파시즘은 자본주의를 새로 포장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계급투쟁을 지우고, 그 자리를 ‘민족 공동체’로 대체한 자본주의였다. 파시즘 운동은 민족의 재탄생을 명분으로 반대자를 제거하고, 그 과정에서 초월적 감각을 얻는다. 재탄생을 가로막는 모든 것은 파괴돼야 한다. 그래서 파시즘에는 언제나 민병대가 있었다. 그곳은 파시즘적 남성성의 에너지가 “리듬, 도취, 강박, 비탄”에 맞춰 분출되는 공간이었다. 독일 사회학자 클라우스 테벨라이트가 묘사했듯, 그 안에서는 “행진, 발 구르기, 기어오르기, 추격, 찌르기, 승리”의 동작이 반복된다.

이탈리아 역사학자 엔초 트라베르소는 『파시즘의 새로운 얼굴들』에서 이 논쟁의 개념적 난점을 이렇게 요약했다. “요컨대 파시즘 개념은 이 새로운 현실을 이해하는 데 부적절해 보이면서도, 동시에 필수적이다.” 트라베르소에 따르면 우리가 마주한 것은 낡은 파시즘의 귀환도, 완전히 새로운 무엇도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복고적 상상력에서 자원을 끌어오지만, 미래의 모습은 아직 불분명한 혼종적 정치운동이다. 트럼프가 파시스트냐는 질문 앞에서 분석은 흔히 이분법으로 흐른다. ‘그렇다’거나 ‘아니다’라고 답하거나,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기준을 몇 개 충족하는지 따지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지나치게 고정적이다. 급진우파가 움직이고 변화하며 스스로를 조정하는 역동성을 충분히 포착하지 못한다.

‘민주적 파시즘’인가

초기 파시스트들은 ‘파시스트’라는 이름을 자랑스럽게 내걸었다. 그러나 홀로코스트의 범죄가 드러난 뒤 상황은 달라졌다.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극우 정당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태도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노골적인 반민주주의는 지워진다. 오히려 그들은 끊임없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상대를 반민주적이라고 비난한다.” 우리는 오늘날 등장하는 극우를 설명하기 위해 ‘민주적 파시즘’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겉보기에는 모순처럼 보인다. 파시즘은 정치체제로서 민주주의의 부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행어처럼 쓰이는 ‘파시즘’ 담론은 중요한 과정을 놓치기 쉽다. 파시즘은 민주적 질서 안에서 등장해 권력을 잡고, 이후 그 질서를 내부에서 파괴했다.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합법적으로 권력을 잡은 뒤 수권법이 통과되기까지 불과 몇 주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가 완전한 독재를 구축하는 데 3년이 걸렸다.

‘민주적 파시즘’이라는 개념은 오늘의 파시즘이 모순적이고 불분명한 조건 속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트럼프 행정부가 곧바로 파시즘 체제라는 뜻은 아니며, 독일이 파시즘 쿠데타를 눈앞에 두고 있다는 뜻도 아니다. 극우는 민주주의 안에서도 일정한 목표를 이룰 수 있다. 그럼에도 20세기 파시즘과 오늘의 파시즘은 자기 인식에서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스스로를 ‘민족 혁명가’로 여긴다는 점이다. 헤리티지재단 대표 케빈 로버츠는 지지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 두 번째 미국 혁명을 진행하고 있으며, 좌파가 허용한다면 피를 흘리지 않고 끝날 것이다.”

현대 파시즘 운동은 민주주의를 ‘개혁’하겠다고 주장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려 한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독재가 공개 의제로 제시돼 있지는 않다. 민주적 파시즘의 핵심은 바로 이처럼 민주주의를 대하는 양가성에 있다. 20세기 파시스트들이 의회주의를 파괴하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던 것과 달리, 민주적 파시스트들은 민주주의에서 자유주의적 제도만 걷어내려 한다. 때로 군주제적 환상에 빠지기도 하지만, 이들이 겨냥하는 것은 민주주의 자체의 즉각적 폐지가 아니라 그 안의 자유주의적 견제 장치다.

지금까지 트럼프식 파시즘은 스티븐 레비츠키와 루컨 웨이가 말한 ‘경쟁적 권위주의’에 가까웠다. 선거는 치러지고 권력 경쟁도 존재하지만, 권위주의적 집권 세력이 경쟁의 규칙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기울이는 체제다. 야당은 합법적으로 존재하지만, 사법부와 언론은 더 이상 독립적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정치 경쟁은 약화된다. 그럼에도 민주적 파시즘은 우리가 아는 민주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른 민주주의 관념 위에 서 있다. 그 토대 가운데 하나가 독일 법학자 카를 슈미트다. 그는 제3제국의 ‘수석 법률가’로 불렸고, 나치의 뉘른베르크 인종법을 “자유의 헌법”이라고까지 불렀다. 오늘날 슈미트는 피터 틸과 J. D. 밴스 같은 인물들에게 중요한 사상적 참조점이 되고 있다.

슈미트에게 민주주의는 보통선거와 의회 토론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진정한 민주주의”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동일성”이었다. 국민의 일반의지가 국가 지도자에게서 표현될 때 민주주의가 성립한다고 봤다. 그러려면 “서로 비슷한 구성원들로 이뤄지고, 정치적 존재의지를 가진 국민”이 전제돼야 한다. 슈미트는 그 뜻을 분명히 했다. “민주주의는 첫째 동질성을 요구하고, 둘째 필요하다면 이질성의 제거 또는 근절을 요구한다.” 민주적 파시즘에서는 이 ‘일반의지의 동질성’이 다수주의로 나타난다. ‘토착 다수’의 이익에 맞춰 민주주의를 재편하는 것이다. 그들은 소수자 권리의 확대가 자신의 존재를 위협한다고 느끼며, 그래서 소수자의 정치·사회적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고 믿는다. 여기에 대규모 추방이 결합하면, 슈미트식 사고의 현대화된 변형이 된다.

트럼프는 소수자와 반대파를 겨냥하는 권위주의 국가를 만들려 할 수 있다. 그러나 교육이나 환경 같은 영역에서는 국가의 개입을 대폭 줄이려 한다. 나치가 ‘보통 사람들’은 물론 기업가 계층까지 통제하고 지휘하려 했다면, 트럼프의 국가는 오히려 그들의 길을 터주는 쪽에 가깝다. 그 바탕에는 사업가가 국가의 지원은 받되 지휘는 받지 않고, 원하는 대로 이윤을 추구해야 한다는 발상이 있다. 20세기 파시즘이 프란츠 노이만의 표현처럼 법 없는 거대 괴물이었다면, 오늘의 파시즘은 규제가 풀린 국가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합작 사업’에 가깝다. 환경 규제도, 차별금지법도 이를 막지 못한다. 20세기 파시즘이 ‘총통합’을 약속했다면, 민주적 파시즘은 신자유주의적 해체가 한층 더 급진화된 형태로 나타난다.

민주적 파시즘은 정당 조직의 견고한 추종 기반에 기대지 않는다. 대신 고도로 정치화된 공론장과 감정적 네트워크 속에서 결속을 만들어내는 ‘과잉 정치’에 의존한다. 그 안에서는 고정된 특징의 목록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다형적 정치 스펙트럼이 펼쳐진다. 트럼프 쪽으로 돌아선 공화당 인사들, 마가 열성 지지층, 실리콘밸리의 자유지상주의적 권위주의자들, 복음주의 기독교인, 프라우드 보이즈, 분노한 티파티 지지자들이 트럼프라는 지도자 아래 동맹을 이뤘다. 그러나 이들을 움직이는 논리는 저마다 다르다. 굳이 공통분모를 찾는다면 반평등, 반세계주의, 배제의 정치다.

이 점에서 민주적 파시즘은 ‘적’에 집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현대화된 민족의 모습을 상상한다. 개인의 삶의 방식이 자유화되는 흐름을 되돌리려 하지만, 그것이 사회적 위계를 재생산하는 한 동성애의 ‘공개성’ 자체를 반드시 문제 삼지는 않는다. 반면 트랜스젠더에 대한 공격은 위계를 흔드는 ‘비이분법성’을 겨냥한다. 성별의 경계를 흐리고 기존 질서를 불안정하게 만든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종주의 역시 단일한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인구정책은 국가 운영의 핵심 도구다. 트럼프의 표현처럼 “아이큐가 낮은”, “쓰레기 같은” 이민을 줄이겠다는 것이 목표다. 그러나 그것이 곧장 균질한 민족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계획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젠더 관계에서도 트럼프 주변 우파는 ‘페모내셔널리즘10)’ 성향을 강하게 보인다. 이들은 낙태권을 공격하고 전통적 가족 모델을 밀어붙인다. 그러나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나 정치적 의사결정 참여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10) 여성의 권리나 성평등의 언어를 내세워 이민자와 무슬림, 외국인을 배척하는 정치를 뜻한다. 극우 세력이 “여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인종주의와 반이민 정서를 정당화할 때 자주 쓰인다.

원한을 ‘사업’으로 만드는 트럼프

새로운 파시즘도 신화화된 민족의 과거를 불러낸다. 다만 초월적 질서를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는다. 오히려 ‘복원적 기원 신화’에 가깝다. 트럼프의 구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는 복원의 언어다. 미국은 다시 위대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새 제국은 신성이나 초월의 외피를 벗고 세속화된다. 세계를 지배하는 제국을 바라지만, 그 제국은 자기 힘만으로 위대하면 충분하다는 발상이다.

마가 지식인들의 세계에는 온갖 ‘질서의 환상’이 넘쳐난다. 최고경영자가 황제가 되는 군주적 시장경제, 사유도시와 사유국가, 기술적 특이점과 화성 식민지 같은 어두운 유토피아가 그것이다. 그러나 트럼프의 미래상은 그에 비해 비교적 ‘현실적’으로 보인다. 일탈적 상상은 주로 밈이나 인공지능으로 만든 환각적 영상에서 두드러진다. 그 안에서 트럼프는 로마 황제, 복수하는 슈퍼히어로, 또는 인종 청소가 끝난 가자지구에 세워진 황금 동상으로 등장한다.

네오파시스트들은 사회 전체를 ‘민족의 신체’로 보고 그 분자 단위까지 재구성하는 데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다. 성중립 언어 금지, 낙태권 제한,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 탄압이 이어지더라도, 정치와 경제, 일상을 모두 지배하는 포괄적 전체주의 국가를 만들려는 의도는 아직 뚜렷하지 않다. 네오파시즘은 전체주의 국가의 건설이라기보다, 새로운 권위주의적 위계 사회의 복원에 가깝다.

트럼프는 아직 독재자가 아니다. 구원과 초월을 약속하는 고전적 파시스트도 아니다. 오히려 천박한 마피아 보스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스타일은 크리스토퍼 브라우닝의 표현처럼 파시즘적이다. 선동적 집회, 공포와 불만, 피해의식을 끊임없이 부추기는 방식, 폭력에 대한 가벼운 승인, 음모론의 광범한 수용, 잔혹함을 무대화하는 연출, 주변부와 약자를 노리는 야성적 본능, 그리고 개인숭배가 그것이다. 파시즘의 스펙트럼에는 사회학자 마이클 만이 말한 ‘도덕화된 폭력’과의 위험한 유희도 포함된다. 폭력을 필요하고 정당하며 옳은 것으로 포장해 정당화하는 방식이다.

이런 파시즘적 스타일은 독일대안당(AfD)에서도 나타난다. 지방당 지도자 비외른 회케는 독일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를 즐겨 인용한다. 슬로터다이크는 2016년 유럽의 이민정책을 논하며 “절제된 잔혹함”을 언급한 바 있다. 더 넓게 보면, 민주적 파시즘과 20세기 파시즘은 모두 미학과 정서에 크게 기대는 정치라는 점에서 닮아 있다. 독일 신우파의 선구적 사상가 아르민 몰러는 이를 이렇게 요약했다. 파시즘의 수사는 논리적 연결보다 “특정한 톤을 맞추고, 분위기를 만들며, 연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가깝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자유주의 진영은 법적 공세, 이른바 ‘로펌 정치’로 트럼프와 극우 급진세력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법정에서의 대응만으로는 이 흐름을 멈출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힘의 균형은 법체계에도 반영되며, 트럼프는 재산 소유자 계급의 이해를 대변한다. 더 중요한 것은 파시즘이 단지 제도와 법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에 널리 퍼진 불안과 분노를 먹고 자라는 정치라는 점이다. 트럼프는 경쟁과 불평등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생겨난 깊은 소외감을 건드리며 권력을 잡았다.

그는 원한과 분노를 만들어내는 데도, 그것을 대변하는 데도 능한 ‘원한의 기업가’다. 좌파는 아직 이에 맞설 효과적이고 지속 가능한 대응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그 대응의 실마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단단할지 모른다. 미니애폴리스에서 ICE에 맞선 저항이 힘을 발휘한 것은, 무엇보다 미국 우파가 그려온 서사를 깨뜨렸기 때문이다. 다인종 공동체는 우파의 종말론적 예언자들이 떠올린 사회 붕괴의 풍경보다 훨씬 강한 결속을 보여줬다. 파시즘이 불안과 원한을 먹고 자란다면, 그에 맞서는 힘은 바로 이 결속에서 시작될 수 있다.


• 카롤린 암링거는 바젤대 언어문학학부 연구원으로, 문학사회학을 연구한다. 『상처받은 자유: 자유지상주의적 권위주의의 부상』의 공동 저자다.
• 올리버 나흐트베이는 바젤대 사회학 교수다. 『상처받은 자유: 자유지상주의적 권위주의의 부상』의 공동 저자다.
• 로렌 발호른은 『자코뱅』 독일어판 편집장이다.

 

원문 출처:
https://jacobin.com/2026/05/democracy-fascism-trump-far-right

 

We Are Watching the Rise of Democratic Fascism

Bertolt Brecht predicted it in 1942: American fascism would be democratic in the American fashion. He was right. That's precisely what makes it so hard to st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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