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이는 금호동에 나는 신당동에 산다. 서로 알고 지낸 지 12년쯤 되었다. 누군가에게 날 소개할 때면 꼭 나를 '아랫동네에 사는 친구'라 말하는데, 나는 그때마다 '내가 아랫동네에 사는 게 아니라 네가 산동네에 사는 것'이라고 바로잡는다. 자기는 윗동네 살고 나는 아랫동네 산다는 프레임, 12년째 같은 수법에 당하고 있다. 사진첩을 들여다보는데, 오호 십 년 전 노래방에서 찍은 사진이다. 내가 여기도 갔구나. 함량 미달이지만 나름 기타리스트로서 음악을 진지하게 임할 때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에 노래방은 기피하는 편이다. 어쩌다 끌려 들어가면 마이크를 잡는 대신, 구석에 앉아 사진을 찍는 게 더 즐겁다. 영국이가 어쩌면 공옥진 여사의 계보를 잇는 우리 시대 춤꾼은 아니었을까? 이 사진이 굴욕샷인지 예술혼을..
봉수: 형님 제 프로필 사진 좀 찍어주세요.나: 스튜디오부터 잡아야겠구먼. 의상은?봉수: 제가 알아서 가져갑니다.나: 응. 난 포즈만 잡아주면 되겠네. 며칠 뒤 신당동에 위치한 어느 작은 스튜디오. 그런데 목마가 있다. 목마라니 참 좋구나. 이 의상들과 가발은 다 뭐지? 봉수는 어디서 이런 걸 빌려왔을까? 똘끼가 충만한 모델과 아스트랄한 정신세계를 가진 포토그래퍼가 만나면 결과물은 이렇다. 물론 이 사진은 특정 무속신앙과 아무런 관계 없으며, 봉수는 유명한 논현동 moto의 오너쉐프. 니콘 D4, 24-70mm f/2.8 (58mm), f/8.1, 1/160 sec, ISO 200
도심 재생 프로젝트로 옛 모습을 보존하는 한편 예술성을 가미해 현대적으로 재단장한 '새로 세운' 세운상가일몰 시간과 겹쳐서 본의 아니게 헬조선 컨셉남북으로 난 주출입구를 통과해 양측 계단을 오르면 옥상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 낡은 도심 풍경과 함께 종로 일대를 한눈에 감상할 수 있던 비밀의 장소로, 운이 좋아야 출입할 수 있었는데 이번에 개방되었다. 우측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이 고양시 저유소 사고 현장이다. 고질라가 나타나 '어우우' 하고 돌아다녀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 ~ _~
본격적인 사진 취미에 돌입했다면 사용 중인 렌즈들이 원하는 곳에 기계적으로 정확히 포커스가 맞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애써 구도를 잡고 셔터를 눌러도 찍는 족족 실패한 사진만 얻게 된다. 첨부파일을 다운로드해 출력하고 재단선을 따라 잘라 타겟을 세우고 타겟을 촬영해 핀이 정확히 맞는지 점검할 수 있다. 원하는 곳에 포커스가 맞지 않는다면 편차가 얼마인지 확인하고 필요한 경우 고객센터를 방문해 교정해야 한다. 칼핀신의 가호가 함께 하시기를~카메라 취미가 없다면 두꺼운 종이를 뒤에 붙여 BB탄용 과녁으로 써도 된다. 인생 일은 알 수 없으니 자녀가 국가대표 사격 선수로 성장할지 모를 일. 혹은 킬러가 된다거나 (- ㅅ-) 슈무룩
1999년산 오리지널 진로 소주. '새로운 한국을 다시 만듭시다' 문구가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으로 미국경제와 국제투기자본 아래로 한국 경제 예속화가 가속되던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이제는 당연시 여겨지는 비정규직은 IMF 구제금융의 대가로 미국 재무부와 체결한 합의의향서로부터 출발했다. 국민들은 스러져가는 경제 불꽃을 되살리고자 금을 모아왔지만, 상전 미국과 국제투기자본은 준노예 계약에 사인을 요구한 것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역사를 되돌릴 수있다면 이 합의의향서를 찢어버리고 싶다. 비정상의 정상화로 인해 얼마나 많은 차별과 슬픔이 파생했던가? 아무튼 소주는 25도.
용산참사 희생자들은 우리 주변에 흔하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이웃이었다. 세든 건물이 재개발로 팔려나가 큰 손해를 보고 쫓겨나게 되자 이주 대책과 보상을 요구했지만 철거 용역들은 가게 입구를 흙으로 막고 조롱하며 '곱게 나갈래? 험한 꼴 보고 나갈래?' 하며 협박했다. 보상 대신 공사장 남는 터에서 한시적으로나마 영업할 수 있게 해달라 애걸했지만 이조차도 거부당했고, 하루아침에 철거민 신세가 된 이들은 세상에 이런 법은 없다며 눈물을 닦고 입술을 깨물며 옥상에 올랐다. 2009년 1월 19일, 7년전 지금 이 시간이다. 단 한 번의 협상도 없었다. 농성 개시로부터 불과 25시간 만에 정부는 세입자들을 괴롭히던 용역 깡패를 앞세우고 경찰 특공대와 1600명의 경찰 병력, 물대포를 투입해 이들을 무력 진압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