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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 희생자들은 우리 주변에 흔하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이웃이었다. 세든 건물이 재개발로 팔려나가 큰 손해를 보고 쫓겨나게 되자 이주 대책과 보상을 요구했지만 철거 용역들은 가게 입구를 흙으로 막고 조롱하며 '곱게 나갈래? 험한 꼴 보고 나갈래?' 하며 협박했다. 보상 대신 공사장 남는 터에서 한시적으로나마 영업할 수 있게 해달라 애걸했지만 이조차도 거부당했고, 하루아침에 철거민 신세가 된 이들은 세상에 이런 법은 없다며 눈물을 닦고 입술을 깨물며 옥상에 올랐다. 2009년 1월 19일, 7년전 지금 이 시간이다.

단 한 번의 협상도 없었다. 농성 개시로부터 불과 25시간 만에 정부는 세입자들을 괴롭히던 용역 깡패를 앞세우고 경찰 특공대와 1600명의 경찰 병력, 물대포를 투입해 이들을 무력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사망하고 24명이 부상당했다. 사망한 철거민 5명은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유족 동의조차 없이 강제 부검이 실시되었고, 생존자 전원은 유죄 판결을 받았다.

깨어있는 시민들과 청년,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달려와 희생자들을 조문했다. 건물 곳곳에 묻어있는 그을음, 깨진 유리창, 고여있는 물에 가슴은 내려앉았다. 개발의 탐욕이 사람을 삼켜버린 현장에는 '살려고 올라갔는데 죽어서 내려왔다'는 피켓이 붙어있고, 혹시 모를 '소요 사태'를 막기 위해 경찰 살수차 두 대가 참석자들을 조준하고 있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사진들을 통해 살인자들의 만행을 고발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한다. 용산참사는 2009년의 세월호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경찰의 살수차 사용을 막았다면, 백남기 농민의 희생도 없었을 것이다. 

이상림(72), 양회성(58), 한대성(54), 이성수(51), 윤용헌(49). 탐욕의 개발에 맞서 시대의 망루에 올랐던 다섯 명의 철거민들을 잊지 말자. 다시는 이 땅에 이와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 살아남은 우리는 그들을 기억하고 용산참사의 진실을 끝까지 밝혀낼 것이다.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용산 철거민 사망사건 개요
http://mbout.jinbo.net/webbs/view.php?board=mbout_11&id=4511&page=3

덧붙임) 국화꽃과 촛불을 든 사진의 주인공을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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