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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이 이란 침략 비용을 아랍국이 분담해야 한다고 공언하면서, 전쟁의 부담을 역내로 떠넘기는 ‘청구서 외교’가 노골화하고 있다. 백악관은 작전이 4~6주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희망사항'도 내걸었다. 그러나 전쟁이 한 달을 넘기며 역내 국가의 생계·안전은 물론 세계 경제가 직격탄을 맞는 가운데, 친미 국가들조차 “사고는 미국이 치고, 수습은 우리가 한다”는 불만이 커지고 있다.
4~6주면 목표 달성, 돈은 아랍이 내라
문제의 발언은 3월 30일(현지) 캐롤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 브리핑에서 나왔다. ‘걸프전(1990~1991) 때처럼 사우디·쿠웨이트·UAE 등이 비용을 댈 것이냐’는 질문에 레빗은 트럼프가 아랍국들에 비용 분담을 요구하는 데 “꽤 관심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대통령보다 앞서 말하진 않겠다”면서도 “대통령이 가진 아이디어”라고 못 박았다.
‘4~6주 시간표’도 레빗의 발언을 통해 다시 확인됐다. 백악관이 ‘장대한 분노 작전’의 목표로 내세운 것은 ▲이란 미사일 프로그램 파괴 ▲이란 해군 무력화 ▲핵무기 획득 차단 ▲역내 무장조직 지원 중단 등이다. 레빗은 3월 초부터 ‘4~6주’를 거론해 왔고, 3월 말에도 미 행정부 인사들은 수 주 안에 작전을 끝낼 수 있다는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왜 지금 ‘청구서’인가
YTN은 백악관 설명을 인용해 개전 약 2주간 들인 전쟁 비용만 120억 달러(약 18조 3천억 원)에 달하며, 전쟁이 길어지면서 추가 예산 요구도 거론된다고 보도했다. 전쟁이 단기전으로 끝나지 않으면, 비용·유가·물가·여론의 역풍이 백악관을 압박한다. 트럼프의 청구서 구상은 미국 전역 3,000여 곳에서 800만 명이 참여한 노 킹스(No Kings, 왕은 없다) 집회 직후 나왔다. 명분도 도덕성도 실익도 없는 '작전을 빙자한 전쟁'의 비용을 걸프 지역 동맹국에 떠넘기려는 발상이다. 국제경제 충격 역시 분담 요구의 명분이다. 국제통화기금은 호르무즈 해협 봉쇄와 기반시설 피해가 세계 물가를 끌어올리고 성장률을 갉아먹는다고 경고했다.
걸프·아랍권 반응
➀ “이 전쟁은 우리 전쟁 아냐”
‘아랍이 비용을 내라’는 발언은 동맹국을 협력 상대가 아니라 청구서 수신인으로 취급하는 태도에 가깝다. 중동의 이른바 친미 국가들에서조차 미국 책임론이 공개·비공개로 터져 나온다. 로이터는 3월 11일 “걸프는 전쟁을 원치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공항·항만·호텔·석유시설이 타격을 입고 경제·안보의 대가를 치른다”는 역내 소식통들의 불만을 전했다. 아랍에미리트의 한 유력 재계 인사도 당사자가 아닌 전쟁에 끌어들인 대가를 너무 가볍게 보는 것 아니냐고 공개 비판했다. 다만 현 시점에서 걸프 국가들의 공식 논평은 확인되지 않는다.
➁ “이왕 시작했으면 끝을 보자”
반면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 등 일부 국가는 조기 휴전이 오히려 불안을 키울 수 있어, 이란에 결정적 타격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AP통신은 걸프 지역 동맹국들이 트럼프에게 이란이 결정적으로 약화될 때까지 전투를 계속해야 한다는 뜻을 비공식 경로로 전달했다고 보도했다. 로이터통신도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협박 수단으로 삼지 못하도록 능력을 크게 약화시켜야 한다는 일부 왕정·안보 엘리트의 강경 기류가 걸프 지역에서 커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런 강경론이 전쟁의 비용과 피해까지 없애주진 못한다. 로이터통신은 카타르·오만·쿠웨이트가 물밑에서 조속한 종전을 요구하는 반면, 아랍에미리트·사우디아라비아·바레인은 확전을 감수하더라도 ‘사후 이란’이 위협을 지속하는 상황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라고 전했다. 걸프 내부가 한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현실은 ‘분담금 청구’가 불러올 파열음을 예고한다.
③ 트럼프가 멈춰야 vs 새 판 짜자
이집트와 터키 등 주변 강대국의 계산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이집트의 압델 파타 시시 대통령은 전쟁을 멈출 수 있는 인물은 트럼프뿐이라며, 국제 유가가 배럴당 200달러까지 치솟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전쟁 장기화의 충격이 결국 중동 각국의 물가·식량·일자리 문제로 이어진다는 우려가 바탕에 깔려 있다. 이집트·사우디아라비아·터키·파키스탄 외무장관들은 이슬라마바드에서 만나 휴전과 중재를 모색하고 있다고 전했다. 역내 국가들이 자국의 이해를 앞세워 별도의 출구를 찾으려는 움직임이다.
④ 이란: 협상은 없다
이란 국영 매체 프레스TV도 인터뷰와 전언을 근거로, 미국이 걸프 국가들에 수조 달러를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이란은 미국이 제시한 평화안을 비현실적이라고 일축하며, 협상 진행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모하마드 바게르 갈리바프 이란 의회 의장은 미국의 지상전 준비를 비판하며, 미군과 역내 동맹국을 겨냥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란은 전쟁 종결의 조건으로 미군 기지 철수, 배상, 제재 해제 등을 요구하고 있다.
국제사회: 민간 공격 중단 요구, 경제 충격 경고
주요 7개국(G7) 외교장관들은 민간인과 기반시설에 대한 공격의 즉각 중단, 그리고 호르무즈 해협의 자유로운 항행 보장을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트럼프가 이란의 에너지·담수 시설까지 거론하며 위협 수위를 높이는 국면에서, 사태가 통제 불능으로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국제사회가 최소한의 기준을 마련하려는 시도다. 국제통화기금도 호르무즈 해협 봉쇄와 기반시설 피해가 에너지·비료·식량 가격을 밀어 올려 결국 물가 상승과 성장 둔화를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전쟁의 비용이 중동을 넘어 국제적 식량난과 고용 불안으로 번지고 있음을 뜻한다.
몰락하는 미국 패권
백악관은 ‘4~6주 내 종전’이라는 시간표를 내세워 전쟁이 통제 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한편, 걸프전식 ‘분담금 모델’을 되살려 비용 부담과 국내 정치적 역풍을 줄이려 하고 있다. 그러나 걸프 내부에서는 전쟁을 원하지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피해만 떠안는다는 불만이 커지고 있다. 이런 정서는 미국의 ‘보호’ 아래 유지돼 온 기존 질서를 다시 보게 만들고, 대외 관계의 다변화를 재촉할 수 있다.
낙관적 전쟁 전망과 현실의 괴리, 동맹 내부의 분열, 전쟁 비용의 역풍, 그리고 그 부담을 다시 역내에 넘기려는 트럼프의 구상은 중동 정세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며 미국 패권의 균열을 드러낸다. ‘적당히 봉합하고 빠져나오는 길’이든 ‘지상전의 수렁’이든, 어느 쪽도 미국 패권의 쇠퇴를 감추지 못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