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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어느 날 서대문 친척집에 가다가 엄청난 시위 인파와 전경에 막혀 서울역에서 오도 가도 못하다 걸어서 집까지 돌아온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국민학생이었는데 하늘은 매캐한 최루탄 연기로 바닥은 깨진 돌멩이들로 가득 찬 종로를 지나 동대문을 거쳐 안암동까지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어머니 손만 붙잡고 질질 끌려가다시피 걸어 간신히 도착했다. 

흑백 TV에서는 광주에 폭동이 일어났고 유언비어가 난무한다는 보도가 연일 계속되었다. 왜곡된 보도였다. 지금은 광주로 편입된 송정리가 외가여서 어머니가 발을 구르며 걱정했던 장면도 떠오른다. 방학이 되어 외가에 가면 불 끄고 잠이 들 때쯤 '옆집 김씨 아들이 어떻게 죽었다' '군인들이 신문지를 말아 휘두르는데 맞으면 픽픽 쓰러져서 알고 보니 쇠파이프를 감추고 있었다' '어디를 파보면 시체가 나올 것이다' 소리가 소곤소곤 들리는데, 낮에는 아무도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국가가 국민을 학살하는 살벌한 시기였다. 그리 오래전도 아니다.

시간은 지나 91학번 대학생이 되었다. 당시까지도 '80년 광주'는 금지된 단어였고 '광주민주화운동'은 그때까지도 '광주사태'였다. 골방에서 몰래 '광주항쟁의 진실' 비디오를 보려면 잡혀갈 용기까지 필요했다. 대학마다 '전두환 노태우 체포결사대'가 꾸려져 말 그대로 머리 터지게 싸웠다. 대학 축제가 5월에 열리고 그 이름이 대동제였던 것도 이를 계승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게 광주항쟁은 시대정신의 사표로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새겨졌다.

세월은 흘러 흘러 거울을 보면 중년 남자가 서있고 미래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 도통 실감이 나지 않는 2020년이다. 반란 군인들이 정변으로 국가 권력을 찬탈하고 국가의 주인인 국민들을 학살한 지 40년이 되는 해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바쳐 싸웠고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내야 했던 80년 광주의 그날이 또 찾아왔다. 반민주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횃불로 이 땅 민주주의를 밝힌 광주 영령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몫까지 대신 살아가야 할 것이다.

초판을 가지고 있었는데 누군가에게 주었는지 없다. 내 손을 떠난 책이 단 한 명에게라도 더 읽혔을 테니 아쉽지도 그립지도 않다. 많은 이들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희생되었고 또 누군가는 그 진실을 밝히기 위해 목숨 걸고 책을 썼다. 황석영님이 기록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여러분들에게 권한다. 이 책은 광주 5월 항쟁의 기록을 담은 진짜 역사 교과서이다.

 

책 정보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 지음 / 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옮김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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