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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한반도 평화 국면 조성을 위해 한미군사훈련 조정 가능성을 언급하자, 미국 외교당국은 즉각 ‘우려’를 전달했다. 이는 ‘동맹국’의 정책에 사실상 제동을 거는 신호였다. 그럼에도 이재명 대통령은 외신 기자회견에서 “대화 여건 조성에 필요하다면 한미 연합훈련 문제도 논의하고 고민할 수 있다”고 밝히며, 한반도 문제의 직접 당사자로서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불과 나흘 뒤 위성락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은 “훈련 축소를 카드로 쓰지는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
통일부 장관의 문제 제기, 대통령의 공개 발언, 그리고 그 직후의 입장 후퇴는 우연이 아니다. 이는 대한민국의 주권 행사가 미국의 압력 아래 놓여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며,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작동하는 내정간섭의 실체를 드러낸 사례다.

‘한미 대북정책 공조회의’는 제2의 한미워킹그룹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남북관계 복원 논의가 본격화되자 ‘한미 대북정책 공조회의’라는 이름의 협의체가 다시 등장했다. 그러나 명칭이 바뀌었을 뿐, 남북관계의 방향과 속도를 한국 정부가 아니라 한미 간 비공개 협의 구조가 사전 조율하고 사실상 통제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이는 제2의 한미워킹그룹이라 불러도 무리가 없다.
임동원·정세현·이재정·조명균·김연철·이인영 등 전직 통일부 장관 6인의 공동성명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분명히 했다. 이들은 과거 한미워킹그룹이 문제 해결을 위한 협의체가 아니라, 남북관계 개선을 가로막고 제재의 문턱만 높이는 통제 장치로 작동했다고 평가했다. 남북 정상 간 합의가 워킹그룹 단계에서 번번이 멈췄고, 인도적 지원조차 제재 논리에 가로막혔다는 경험은 이를 뒷받침한다.
전직 장관들이 지적한 또 하나의 핵심은 주도권의 문제다. 헌법과 정부조직법은 남북관계의 주무 부처를 통일부로 명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외교부 중심의 대북정책 조율 구조가 굳어진다면, 남북관계는 자주·평화·통일의 문제에서 외교·안보 관리의 문제로 축소될 수밖에 없다.
문재인 정부 시절 한미워킹그룹이 결국 종료된 것도 이 같은 구조적 한계 때문이었다. 이번 전직 장관들의 공동성명은 반복되어서는 안 될 실패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그럼에도 지금 다시 제2의 한미워킹그룹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남북관계 복원을 위한 해법이라기보다, 과거 실패한 틀을 재가동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남북관계를 관리와 통제의 대상으로 다루는 한, 이들 협의체에 어떤 이름을 붙이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국민주권정부의 깃발을 건 이재명 정부는 남북관계를 가로막아온 제2 한미워킹그룹을 만들어 실패를 반복할 것인지, 아니면 그 고리를 끊고 새로운 자주와 평화, 통일의 미래로 나아갈 것인지의 기로에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제2의 한미워킹그룹이 아니라, 한반도의 긴장을 낮추고 북·미 남·북 대화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한미군사훈련을 중단하고 북을 적으로 규정한 국가보안법을 없애는 것이다.
다음은 ‘한미 대북정책 공조회의’ 가동에 반대하는 전직 통일부 장관들의 성명 전문이다.
제2의 한미 워킹그룹을 반대합니다.
한미 양국은 대북정책에 관해 긴밀히 협의해야 합니다. 그러나 과거 한미 워킹그룹 방식으로 이를 진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과거 한미 워킹그룹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생산적인 협의가 아니라, 남북관계 개선을 가로막고 제재의 문턱을 높이는 부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대북정책을 둘러싸고 트럼프 대통령과 미 정부 실무 부처의 의견 차이가 분명한 상황에서, 미국 실무자들과의 대북정책 협의는 남북관계를 개선하기보다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더 큽니다. 최근 언론에 보도된 미국 실무대표의 생각을 보면, 그가 참여하는 한미 정책협의는 북미 정상회담의 환경 조성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정부 차원에서도 대북정책을 외교부가 주도하는 것은 헌법과 정부조직법의 원칙에 반합니다. 과거 남북관계 역사에서 개성공단을 만들 때나 제재 완화를 검토할 때, 외교부는 미국 정부보다 훨씬 더 부정적이고 보수적이었습니다. 전문성이 없고, 남북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외교부에 대북정책을 맡길 수 없습니다.
대북정책은 통일부가 주무부처이며, 경제, 군사, 인도, 사회문화 등 전 분야의 회담 추진 과정에서 부처 간 협의를 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외교부 주도의 한미 워킹그룹 가동 계획을 중단하고, 통일부가 중심이 되어 남북관계 재개 방안을 마련하고,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에 성공할 수 있는 방안을 찾게 해야 합니다.
2025년 12월 15일
임동원(25·27대 통일부 장관), 정세현(29·30대 통일부 장관), 이재정(33대 통일부 장관), 조명균(39대 통일부 장관), 김연철(40대 통일부 장관), 이인영(41대 통일부 장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