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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와 을지로 골목에 자리 잡은 인쇄마을은 우리나라 문화산업의 핵심기지이자 출판문화 생태계의 건강과 다양성을 담보하는 갯벌이다. 웹과 모바일로 미디어 중심축이 이동하면서 전통적인 인쇄사업 기반이 흔들리고 있는데, 가뜩이나 시장이 위축된 마당에 대형 업체들이 자본을 앞세워 일감을 독점하면서 소규모 업체들은 사면초가에 몰려 있다. 이들이 사라지면 인쇄물 가격도 뛰고 어떤 품목들은 아예 생산할 수 없게 되는데, 술로 따지면 장수막걸리만 남고 전국 곳곳의 양조장들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 인쇄 생태계가 파괴되면 복원하는 것은 매우 어려우며, 그 피해는 고스란히 모두의 몫이 될 것이다.

인쇄인 스스로 재교육, 연구 및 협업하는 소통의 장을 마련하면 경쟁력 강화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고민하다 '인쇄인스터디포럼'이 탄생했다. 홍수에 맞서 작은 방주라도 띄워보는 심정으로 소수의 지역 활동가들이 준비하던 중 서울시 지원으로 탄력이 붙어, 종사자는 물론 관심 있는 일반인도 참여해 2019년 3월부터 11월까지 총 9차례의 모임을 성사시키는 성과를 거뒀다. 나는 기획과 디자인에 작은 힘을 보태며 산파 역을 맡았다.

미디어 환경 변화에 대응한 재교육과 교류를 통해 인쇄인 스스로 활로를 개척한다는 취지를 살려 메인 카피는 '아는 게 힘이다'로 정했다. 주인공이 되어야 할 인쇄인들에게 '나와 상관 없는 남의 일'로 보이면 안되기에 어깨 힘을 빼고 직관적이고 통속적으로 접근했다.

도심 곳곳의 현란한 간판에 묻히지 않도록 고대비 + 원색을 적용해 충무로와 을지로 여기저기에 붙였다.

총 9강 중 6강까지 포스터를 만들다가 다음 타자에게 바톤을 넘긴 뒤 잊고 지냈는데, 공공네트워크 담당자가 그간의 진행 성과를 묶은 책이 나왔노라 보내왔다.

예술적 감각이 충만한 최신 경향의 도안에 박수를 보내지만, '아는 게 힘이다'가 맥락 없이 폐기되고 '인쇄 한손 격파'로 변경된 건 아쉽다. 멋지게 보이기에 앞서 본질과 용도에 충실해야 좋은 디자인이다. 인쇄 실무를 집약한 참고서라면 이 제목도 괜찮았을 것이다.

곁가지로 내 이름이 찍힌 책이 또 한권 늘어 부끄럽다.

어릴 적 교과서에서 공룡이 멸종되었다고 배웠지만 실은 조류가 된 것처럼, 붕괴하는 것처럼 보이는 전통적인 인쇄 산업은 사실 진화하는 중이다. 다시 말해 충무로 을지로 인쇄 종사자들은 지금 격렬하게 새 되는 중이다. (- ㅅ-) 슈무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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