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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나의 65년 지기

macintoy 2020. 11. 15. 04:31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절친, 이모씨 아드님 모종태군(실명을 공개하지 않는다)이 안양에 산다. 고 1 때부터 무려 33년 지기인데, 이 녀석이 이른바 간 큰 남자의 최고봉이다. 함께 부어라 마셔라 이야기꽃을 피우다 자정을 넘기면, 한 잔만 더 하자며 기어이 집으로 끌고 가는데, 헤어지기도 섭섭하거니와 대리운전비나 택시비를 아껴주려는 속내를 내가 다 안다. 동네 어귀까지 어깨 걸고 노래를 부르다 대문 앞에 도달하면 멀쩡한 번호키를 두고 동네가 떠나가도록 '인숙아~ 인숙아~' 외치는데, 늦은 시간에 아내가 소리를 듣고 일어나 문을 열어준다. 나는 사색이 되어 손사래를 치지만, 본인은 얼마나 흐뭇해하는지 십수 년을 말려도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종태가 인숙씨를 고 2 때 만났으니, 친구의 아내 역시 내 오랜 벗으로, 함께 나눌 추억도 이야기도 참 많다. 인숙씨가 반달눈을 하고 차려준 술상 앞에서 고장난 레코드판처럼 한 이야기를 또 하다 잠들면, 어느새 해장국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충혈된 눈으로 벌떡 일어나 새벽 만행을 반성하고 눈치를 살피며 이불을 개고 각 잡고 앉아있고, 친구는 혼자 큰 이불을 둘둘 말고 세상 편하게 자고 있으니, 많고 많은 지구 생명체 중에 홀로 천국살이를 하는 복 받은 수컷이 틀림 없겠다. 친구들 사이에서 종태는 행운아로, 인숙씨는 세상에 둘도 없는 천사표로 칭송받는 살아있는 전설이다.

 

--- 절 취 선 ---

 

세월은 흘러 미래사회가 도래했지만, 지난 세기부터 삼십 년 넘도록 우정은 변한 것이 없다. 자정을 넘겨 마시다가 자고 가라며 집으로 끌고 오는 것도 똑같다. 신도시 아파트로 이사오면서 종태는 번호키를 눌러 문을 연다. 인숙씨가 술상을 차려주는 것도 그대로인데 반달눈이 도끼눈으로 바뀌는 중이다. 눈치 9단인 나는 서둘러 술자리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다가 최대한 일찍 일어나 이불을 곱게 개고 각 잡고 앉는다. 칼칼하고 개운한 콩나물 해장국 맛은 그대로구나.

인숙: 이불 개놓은 거 봐라. 친구 반만큼이라도 좀 따라해라!
종태: 깨갱. 끼잉끼잉~
나: 슈무룩 (묵음수행)


가만히 보니 이제는 전세가 완전히 역전되었다. 여리여리하던 인숙씨에게 순악질 여사 풍모가 느껴지고, 평소 아빠를 끔찍이 따르는 딸도 부부간 교전 발생 시에는 중립 완장을 던지고 엄마 편에 붙는다. 밖에서 상남자로 통하는 내 친구가 집에서는 고립무원으로 속절없이 깨지는 모양이다. 착한 눈을 하고 백치미 모드로 신비스럽게 앉아 있자니 친구가 탄압받고, 함께 이불을 두르고 방바닥을 굴러다니자니 내 평판이 무너질 터, 다자간 정상 외교가 이렇게 어렵다.


평소 종태에게 "짜샤, 인숙씨한테 잘 해라. 응? 네 처, 내 오랜 친구야."라고 말했는데, 이번에는 인숙씨한테 "어우야~ 종태 살살 다뤄주세요. 내 절친이잖우. 응? 굽신굽신"하고 나왔다.

경기도 안양 어느 한 집에 절친이 둘이나 산다. 각각 33년, 32년 지기로 도합 65년이나 된다. 볼 때마다 반갑고, 친구 부부가 투닥거리는 걸 지켜보는 재미가 <톰과 제리> 뺨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단풍나무가 가을바람에 잎을 퍼득이며 늘어서 있다. 나무도 친구도 세월 따라 곱게 물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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