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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보안수사대에서 온 편지

macintoy 2019. 8. 10. 23:56

3년 전 오늘, 강릉 당일치기 출장을 다녀왔더니 익일특급으로 등기 우편이 하나 와있었다. 수신인은 내가 맞는데 발신인이 서울지방경찰청 보안2과 보안수사5팀이란다. 2011년부터 5년 동안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나에 대해 온갖 수사를 해왔다고 뒤늦게 통지한 것이다. 이명박근혜 정부 시절에 나는 블랙리스트도 아니고 무려 범죄 용의자였다. 믿기 어렵지만 레알 실제 상황이다.

계정 생성일부터 뒤졌다니 그야말로 비 오는 날 먼지 날 때까지 털었구나. 어림잡아 20년 어치 이메일 내용과 첨부 파일, 메신저 대화 내용, 인터넷에 올린 모든 글을 압수수색 당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내 미성년자 시절까지 검증할 기세다. 이메일 로그기록과 접속지, 유무선 전화 통화 내역은 물론이고 1년 동안 휴대폰 위치 추적까지 했다. 영화 <올드 보이>도 아니고 갸들이 나한테 왜 그랬는지 알 수 없다. 

 

느낌학상 서울지방경찰청 보안수사대에서 이명박 시절인 2011년 가을, 모종의 국가보안법 사건 용의선상에 나를 올리고 꽤나 진지하게 수사한 걸로 추정된다. 공소 시효가 7년이니 유통기한이 다 되어가는 셈인데 기소 없이 내사 종결하기로 하고 통신비밀보호법에 의거 통보해준 것이리라.

나는 '지난 세기'에 학생운동을 거쳐 양심수 후원과 통일운동, 언론운동 등에 몸을 담았다. 대학언론의 대표, 시민사회단체에서 교육선전국장, 대변인 등을 맡은 적도 있고, 진보적 매체를 창간해 편집장으로 뛰며 언론을 바로 세워보겠다고 고군분투했다. 반민주반통일 악법으로 기능해온 국가보안법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지 않기 위해 나름 치열하게 살았다. 그러다 집안 사정으로 청년 운동가의 길에서 스스로 하차해, 평범한 광고 기획자 및 디자이너로 근근이 먹고산다. 현장 운동가의 삶은 종료되었지만 내 DNA에는 스스로 운명의 주인으로 나를 둘러싼 세상을 개조하겠다는 열정이 남아있고, 실무자가 부족한 현장에서 어쩌다 조커로 뛸 때도 있다. 촛불항쟁 때는 작은 힘이라도 보태기 위해 이런저런 디자인 작업에 참여했고, 이명박이 사는 논현동 거리에 그의 구속을 촉구하는 현수막을 디자인해 도배했다. 낮이면 삼성전자 광고를 만들고 밤에는 이재용 구속하라는 현수막을 만들어 붙이면서 살았다. 청년 시절에는 무보수 전업 운동가로, 어른이 되어서는 디자이너로서 틈틈이 힘을 보태며 자주 민주 통일의 대행진에 작은 자양분이라도 되고자 했으니, 나라에서 상이나 감사패를 주면 몰라도 어찌 범죄자 취급을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정체성은 현장 활동가에서 한참 멀어진지 오래다. 그저 육아와 살림, 업무에 쩔쩔 매는 이혼남까지 탈탈 터는 공권력이 한심하다. 그럴 시간에 중고나라 사기범 한 명이라도 잡고 실종아동 한 명이라도 찾으러 다닐 일이지. 20년간의 사생활이 낱낱이 털린 것에 정보적 수치심도 들고,
예전 학생운동 함께 하던 지인들은 '얼마나 한 게 없으면 그렇게 털고도 어떻게 검찰이 기소도 못하냐'고 날 놀린다.

내 주소지는 종로구 명륜동이고 사는 곳은 중구 신당동이다. 청구서와 서류는 당연히 종로로 날아오는데, 주민등록상 주소지로 올 법적 서류가 현 거주지로 배달되었다. 어떻게 알았쥐? ㅎ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국가보안법이라는 괴물이 산다. 그것은 독립투사 때려잡던 일제시대 치안유지법에서 비롯되었고, 경주마의 눈가리개처럼 우리의 상상력과 양심, 사상의 자유를 가로막으며, 식민 분단 체계를 유지하는 진정한 괴물이다. 다가오는 자주통일과 평화번영의 새 시대와 국가보안법은 단 한순간도 양립할 수 없다.

종로서나 중부서에서 수사할 수도 있었는데, 그래도 서울지방경찰청 본청 수사라니 체면은 안 구겼다. 암튼 서울경찰청이나 국정원 어딘가에는 내 사진을 걸어놓고 '반드시 널 잡아넣겠어' 하는 누군가가 있다. 아오 이게 다 뭐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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